우선, 신학정치론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신학정치론의 주된 내용은 책의 최종적인 목표를 위해 기독교 내에서 제기되는 여러 입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책의 최종적인 목표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으로 성서의 내용이 왜곡되게 알려지는 당면 상황에 대해, 이러한 의도 없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부당한 당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따라서 과거의 종교 가운데 오직 외적 형식만이 남아 있다는 것, 심지어 대중의 입에서조차 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보다는 입에 발린 찬사만이 넘쳐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 그리고 믿음이 단순한 맹신과 편견 덩어리로 바뀌게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최형익 역, 14p)
"이성의 빛이 멸시당하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심지어 불경함의 근원이라고 비난받는 상황, 사람들이 자의로 달아 놓은 주석이 신의 말씀으로 간주되고 맹신이 신실함으로 칭송되는 상황"(15p)
만약 이러한 얘기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스피노자가 이 책을 쓰던 17세기 네덜란드의 기독교 사회 안에서 벌어지던 상황이 21세기 한국에서 형성된 기독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별 진전이 없었거나, 혹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기독교인이 현 상황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서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참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유용하나, 한편으로는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이 다루는 사안이 지금에도 과거만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면, 이 책은 이 책의 입장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이나 통쾌함을 준다는 점에서는 유용하지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떤 기독교인(기독교에 대한 구체화되고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무슨 소용인지는 스스로의 입장을 정리하고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책을 읽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가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인 태도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며, 비합리적 태도는 신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이해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후자는 신을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 경우 신에 대해서 무엇이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해진 어떤 것도 신에 대한 사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의 내 아내는 착한 사람일 거야.'처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말하는 이의 심정이나 기대는 반영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가능하다거나, 사실이라거나, 옳다고 밝혀질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비합리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믿는 신은 신에 대한 스스로의 느낌이나 기대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이 책이 목적으로 삼는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의 개념비판'에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서문을 넘기기 전에 이 책을 덮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에 대한 비합리적 태도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에 대해 기대하거나 감상을 가지는 것이 나쁠 이유가 없듯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태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는 이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그러니까 다른 이를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의 감상이나 기대를 신이라고 말하는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발생한다.
다음으로 이 책을 읽는 '합리적인' 기독교인은 성서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가 맹목적인지 맹목적이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맹목적인 태도를 가진 이는 성서가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진리이게끔 하기 위해, 성서 자체의 진술이 '문자 그대로' 아무런 오류가 없는 것이기 위해 성서를 왜곡하거나 자연법칙을 왜곡하는 데에 이성을 사용할 것이며, 맹목적이지 않은 태도를 가진 이는 성서의 저자들도 한 명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이들이 경험하거나 깨달은 내용 전체가 일관되게 가리키는 신의 모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군인이었던 여호수아가 탁월한 천문학자였다고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혹은 어떤 기적도 그에게 계시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여호수아가 원인을 알지 못하면 해가 평소보다 지평선 위에 더 오래 남아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내게는 두 가지 대안 모두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호수아가 낮이 현저히 늘어난 원인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한다."(51p)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솔직한 태도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왜곡하고 변조한다. 이는 다소 비겁하거나 혹은 거짓된 태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합리적이고 맹목적이지 않은 기독교인은 스스로가 믿는 것이 '신'인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입장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전지전능전선한 신이 있다면 신에 대한 이해는 결국 하나로 귀결될 것이고 이러한 이해는 '특정한'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그러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스스로가 믿는 바가 신에 대한 '특정한'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믿는 바가 종교, 즉 어떤 의도를 가지고 형성된 신에 대한 관점에 따른 이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 책에서 성서가 '신'을 믿을 수 있는 근거임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것은 성서를 근거로 신 그 자체가 아닌 신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성서에 대한 왜곡과 편견에 따른 이해가 개입된다는 점이다. 이를 배격하고 성서를 신을 믿기 위한 텍스트로 바르게 사용하자는 것이 스피노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다. 물론 이 시대에는 그의 입장 역시 '특정한' 이해라고 불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모로 나열은 했지만 스피노자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서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맹목적이지 않으며 오직 '신'을 믿는 사람임을 확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러한 사람을 과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였다. 결국 이 책의 의도는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며 이를 자신의 행보에 대한 근거 또는 무기로 사용하는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독교인'이라는 표현은 이미 하나의 정치적 입장을 내포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들 역시 정치적 영역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될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아예 배제하고자 하는 이 점이 이 책이 무척 악의적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