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이버에서 '그린 마일'을 쳐보면 이 영화가 기독교적 영화냐 아니냐를 가지고 수많은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본인은 이런 정보를 미리 들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기독교적 관점으로 영화를 보려는 내 안의 시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 보고나서 생각한 것은 굳이 주인공이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 영화라고 하기에는 좀 더 깊은 함의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린 마일은 1999년작으로 원작은 스티븐 킹, 감독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자주 영화화하는 편인데 대표작으로는 미스트(2006), 쇼생크 탈출(1995) 등이 있다. 주연은 우리나라에는 주로 포레스트 검프로 유명한 톰 행크스다.
체휼 : 처지를 이해하여 가엾게 여김
그린 마일은 1935년 루이지애나의 콜드 마운틴 교도소에 사형수 담당 감방에 근무 했던 간수 폴 에지컴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한 덩치는 크지만 지능은 낮아보이는 흑인 죄수가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죄수의 이름은 존 커피. 그는 남부의 한 농장에서 두 여자아이를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그는 사람의 병을 자신이 흡수해서 방출하는 식으로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폴의 요도염도, 교도소장의 부인이 앓는 뇌종양도 치료해주고 모두는 그런 존이 범인이 아니라 확신하지만 결국 존은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당한다. 이것이 전반적인 이야기인데, 보통 여기서 병을 치료해주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부분에서 존 커피 = 예수라는 식으로 많이들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기독교적 감상은 이런 것이 아니다.
영화 제목인 Green Mile은 사형수가 투옥되어있는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전기의자까지의 거리를 'Last Mile(최후의 마일)'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영화는 존 커피의 능력을 소재로 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이 Green Mile을 걸어가는 순간을 자세하게 다룬다. 어떤 이는 천국을 상상하며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죄악을 돌이키며, 자신이 사라진 이후에 남겨질 것들을 걱정한다. 그린 마일을 다 걷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동안 살아온 삶의 무게다. 아무리 악한 이도 그린 마일이 끝난 후에는 죄 값을 치르고, 자신의 삶을 돌이킨다. 그리고 영원한 휴식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영화는 한 사람의 생명이 끝을 맺는 다는 것(그 인생이 어떠하였든간에)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 엄숙한 입장을 취한다. 간수들은 결코 죄수들에게 죽음의 순간을 미리 언급하지 않는다. 죽음을 놓고 협박하지도 않는다. 그저 모두가 맞을 그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을 도울 뿐이다. 이 감옥에 수용되어 있는 이들이 모두 살인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은 죄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갚는 상황에 있지만 준비된 시간 앞에서 한 '생명'이 가진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존귀함에 있어 동등하다는 명제에 누구나 동의하면서도 다른 이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가볍게 여기는 데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과 폭력이란 얼마나 악마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을 영화는 '에드워드 델라크로와'의 사형집행이 교도관 '퍼시'의 의도적인 절차누락으로 오랜 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장면을 받아들이는 존 커피와 반대편 감방의 죄수 윌리엄 와튼의 반응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존 커피는 델라크로와의 고통을 사형 집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온몸으로 느끼며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반면 와튼은 그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노래부른다. 우리는 끝없이 다른 이의 고통을 느끼고 같이 아파하라 배우지만 어느 순간 무감각해진 마음은 다른 이의 죽음을 단지 환희와 흥분을 가져다주는 유희거리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배고픔에 죽어가는 기아 아동들을 위한 자선행사가 점점 '자선'의 의미는 퇴색되고 '행사'의 의미만 부각되고 있는 현실, 내가 남을 돕는다는 우월감 내지는 쾌감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구호활동 안에서 우리가 따라야할 진정한 이웃사랑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무감각해져 있는 걸까.
극중에서 존 커피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비인간적인 교도관 퍼시와 잔혹한 살인마 윌리엄 와튼을 처벌하는 장면이 있다. 처벌 후에 이유를 묻는 폴에게 존은 자신이 쓴 누명이자 와튼이 저지른 두 자매에 대한 살인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이런 걸 매일 느껴요. 지금 이 세상이 모두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걸요.'
존은 다른 이의 병을 치료하고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신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고통을 체휼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고통을 체휼하기 때문에 그에게 치유의 능력이 주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치유의 능력이 자랑거리나 유용한 능력이 되는 많은 경우와 달리 존 커피는 자신의 능력을 대단치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능력이 자신이 느끼는 모든 고통과 죽음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며 안타까워한다. 최근 교계에 부는 성령운동의 바람에는 방언, 신유, 예언 등의 은사를 구하는 집회들이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초대교회의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들 같은 능력을 우리라고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냐며 성령이 우리에게 은사를 가득 부어주시기를 간구하고는 한다. 아무리 우리에게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어도 우리에게 진정으로 세상 모든 이들의 아픔을 체휼함이 없다면 그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우리가 진정 구해야할 능력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을 체휼하는 그 마음이 아닐까.

Last Mile, 혹은 Green Mile.
위에서는 Green Mile에 대해 죽음과 마주하는 거리임을 이야기했었지만, Green Mile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 여정 자체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존 커피의 Green Mile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감옥에 들어와서 사형당하기까지가 이야기의 전부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모두 폴의 회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임을 볼 때 이 영화는 폴 에지컴의 Green Mile에 대한 이야기라도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 커피의 Green Mile, 즉, 존과 폴이 함께 했던 시간은 약 두어달 정도였다. 그동안 존은 수감되어 있었고, 폴의 요도염을 고치고, 델라크로와의 쥐 '징글스'를 고치고, 퍼시와 와튼을 처벌했으며 교도소장 할의 부인 멜린다의 뇌종양을 치료했고, 죽었다. 사람의 생명을 제대로 살렸다고 볼 수 있는 건 멜린다 부인 뿐이고 나머지는 그의 가진 능력에 비하면 사소한 일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누명도 해명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폴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범죄와 살인에 대해 조금이나마 체휼했고 그는 존의 사형집행 이후 소년 범죄 감화원으로 옮겨 평생을 그곳에서 근무하게 된다. 존은 그의 짧았던 Green Mile을 통해 폴 에지컴과 그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홀로 떠돌며, 친구도 없어 고독한 채로 세상의 모든 고통과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느끼며 괴로워하며 지쳐있던 삶에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 그리고 교도관들의 따뜻한 배려로 그가 개인적으로 바랐던 소원인 영화 관람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존에게 영향을 받고 그의 능력을 나누어 받은 폴은 그 이후의 삶을 소년 감화원에서 어린 친구들을 인도하는데에 바친다.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오랜 삶을 허락받는다. 존의 Green Mile은 폴에게로 이어져 그 삶을 변화시키고 그 자신의 Green Mile을 걷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서 폴이 기도하는 것처럼 그의 Green Mile은 그 주어진 목적을 다해가며 그 끝을 기다리게 된다.
우리의 삶은 결코 혼자이지 않다. 우리가 가끔 하는 기도 중에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은연중에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아니 우리 서로의 삶이 서로 맺고 있는 연관성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Green Mile이라면 결국 그 끝에는 죽음, 곧 영원한 휴식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린 마일은 어떤 삶의 목표, 혹은 사명을 위해 주어졌으며 이는 언제 그 끝을 맞이하게 될까. 그 때의 우리 상황이 과연 어떨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이 우리에게 휴식으로. 기나긴 여정에 대한 보답으로. 존 커피가 본 영화처럼 천사들을 보며 맞이할 수 있다면 마지막 폴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아직은 너무나 멀어보이는 그린 마일을 소망으로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길이 우리에게 너무 외로운 길이 아니길, 너무 벅찬 길이 아니길. 그리고 그렇더라도 이겨낼 수 있기를.

"괴로움을 느끼고 듣는데 난 지칠대로 지쳤어요.
비에 젖은 새처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데도 지쳤고요.
같이 다니면서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나한테 말해 줄 길동무 하나 없었어요.
서로에게 비열한 짓을 일삼는 사람들 모습을 보는데도 지쳤고요.
내 머릿속에 꼭 유리조각이 들어있는 느낌이에요.
돕고는 싶었지만 결국 도움이 못 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이젠 지쳤어요.
어둠 속에서 지내는 데도 지쳤어요. 괴로움이 많습니다. 사방에 깔려있어요.
괴로움을 끝낼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내 능력으론 벅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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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지?
피가 날 정도로 맞았고
바로 2층에는 부모님이 계셨는데 왜 비명을 안 질렀나?"
커피는 고뇌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놈은 동생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떠들면 너 대신 언니를 죽인다.'
언니한테도 똑같은 말을 한 거지요, 아시겠어요?
그 놈은 사랑하는 자매를 죽였어요.
자매는 서로를 아꼈는데... 사랑을 담보로...죽였어요. 이해가 가세요?"
'그런 일은 널리고 널렸어요' 커피의 말이 떠올랐다.
'날마다 벌어져요, 온 세상에서. 어둠. 온세상에 깃든'
-소설 '그린 마일'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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