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 The King, 2005>
감독 : 제임스 마쉬
주연 :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제임스 마쉬 감독은 <맨 온 와이어, 2008>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혁혁한 수상을 자랑한 감독입니다. 뒤늦게 터진 그의 인기에 힘입어 그의 2005년 작 <더 킹>은 2008년, 국내에 개봉됩니다. 광화문 시네큐브와 천안 야우리 영화관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아 많은 관객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었죠(최근에 <마더>도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바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간단합니다.
주인공 앨비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막 해군에서 전역한 청년입니다. 미혼모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앨비스는 전역하자마자 자신의 친부인 데이비드 목사(윌리엄 허트)를 찾아갑니다. 데이비드는 이미 아들 딸 하나씩을 둔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지역에서 인정받는 목사로 있던터라 앨비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를 윽박지르며 자신이 그의 친부임을 부정하고 앨비스를 쫓아냅니다. 그러자 앨비스는 데이비드의 딸 멜러리를 유혹합니다. 이를 알게 된 멜러리의 오빠 폴은 앨비스에게 찾아가 분노를 터트리다 흥분한 앨비스에게 살해당합니다.
폴의 실종에 슬퍼하던 데이비드는 이 모든 것이 앨비스를 거부한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 생각하고 앨비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모두에게 밝히고 그를 아들같이 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에 충격을 받은 멜러리, 그리고 앨비스에 의해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단지 주요인물의 직업이 목사라서, 혹은 폴이 신실하고 잘 교육받은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고, 앨비스가 폴의 대척점에 서있는 대립구도 때문이 아니라도 이 영화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강하게 공격하고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이제 영화가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씩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Q1. 종교가 가진 '거룩함'은 인간의 악함에 대한 그저 포장에 지나지 않는가?
데이비드는 목사입니다. 그는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를 이끌고 있으며 그저 신앙을 가지면 복이 온다는 차원이 아닌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신앙인입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앙이 힘이 있음을 역설하는 힘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 폴은 이런 아버지 아래서 학교에 '창조론'수업을 개설해줄 것을 요구하고 이를 비웃는 학교 친구들을 위해서는 크리스천답게 기도하며 인내하는 선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에게 '인간으로써' 어쩔 수 없는 욕구와 실수, 상처 이른바 거룩하지 않음이 내재되어있음을 끝없이 드러냅니다.
데이비드는 강단에서는 힘있게 복음을 전하고 집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에 여느 청년들이 그러듯 뜨거운 사랑에 빠져 한 여성을 임신시키고는 무책임하게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20년 후에 찾아온 그의 친아들을 냉정하게 벗어납니다. '왜 하필 주일에 와서....2부 예배도 있는데...'라면서 말이죠. 영화는 조금 비겁하게도 이런 앨비스와 데이비드의 만남 후에 그의 설교 장면을 집어넣습니다. 아무런 삶의 충격 없이 안정적인 삶을 살아오던 사람에게 갑자기 나타난 아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지요. 하지만 그는 교회에서는 아무런 흠도 없는 초월적 인간의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끔 그렇게 보이게끔 하지요. 영화는 이 두 장면을 통해 종교적 '거룩'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위에 덮여있을 뿐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런 메세지는 데이비드의 아들 폴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폴은 학교 기독학생회를 이끌며, 주일 찬양팀 리더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학교에 진학해서 목사가 되고자 하는 신실한 청년입니다. 폴은 학교에 진화론만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창조론'도 같이 가르쳐야한다며 창조론 과목 개설을 위해 기도로, 행동으로 움직이는 건실한 청년입니다. 캠퍼스를 위해 청년들과 모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달려와 비웃고 시비거는 미식축구부 학생들에게 오직 인내와 온유로 대응하는 폴의 모습은 이상적인 크리스천 청년의 모습에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장면들을 통해서 이런 모습들에도 조금씩 흠이 나기 시작합니다. 우선 학교에서 창조론 개설에 대한 건의가 묵살당하자 폴은 주일 예배 찬양시간에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토로하며 찬양대신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대변하는 대중가요를 부릅니다. 자신의 감정을 여기저기 토로하고 싶어하는 어린 청년의 모습 그대로이죠. 이 일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또한 폴은 아버지가 데려간 자동차 가게에서 차를 고르며 그 또래 청년들과 다름없는 들뜬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생과 앨비스의 관계를 알게된 폴은 앨비스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욕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모습과 거룩함을 찾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을 때의 그는 이상적이지만 그의 유치하고 어린 마음이 자극받을 때 그 모습은 얼마나 단순합니까. 아무리 종교적인 열의와 모양을 갖추어도 결국 그것은 겉을 포장할 뿐이라는 이 영화의 메세지는 이 두 인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결국 우리가 예기치 못한, 그리고 자각하기 힘든 수준의 일상적이고 저열한 자극에는 쉽게 무너져버릴만큼 그저 종교적 거룩을 위한 거룩에 불과합니까?
Q2. 신이 정의롭고 사랑이라면 왜 극단적인 악이 존재하는가?
영화의 말미에서 앨비스는 데이비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당신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게 해줘요.'
영화는 잔인하게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에서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서 데이비드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데이비드의 삶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삶으로 드러내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여러군데에서 보여줍니다. 폴이 실종되었을 때, 교회 신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폴을 찾고, 데이비드 부부를 위로하기에 힘씁니다. 수시로 데이비드 가족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찾아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폴은 이미 죽어버렸지만 하나님이 폴을 지켜주실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또 데이비드가 앨비스가 자신의 친아들임을 밝히고 그를 거부했었던 그의 부끄러움을 모든 신도앞에서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속죄를 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해를 구할 때,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는 박수와 눈물로 그 고백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아들인 폴을 죽인 앨비스를 데이비드는 정말 정성을 다하고 진심으로 그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모든 정성을 쏟습니다. 하지만 폴은 죽었고, 앨비스는 데이비드의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바보같이 순종하고 따르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원수도 사랑하며 겉옷을 달라하는 자들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며 모든 일에 기도로 힘쓰며 모든 것을 용서하는 아름다운 크리스천들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데이비드가 앨비스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서 모든 신도앞에 고백하는 모습은 기독교적 가치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영화는 이 모든 노력과 인간 이상의 사랑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앨비스는 분명 극한의 악(惡)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불행히도 이런 인물이 비단 영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지금도 네이버 뉴스에 들어가면 우리에게 일어날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한 범죄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도 그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낭만을 간직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신이 나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외치는 앨비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온전할 수 있을까요?
결언
<더 킹>은 도발적인 영화입니다. 단지 기독교적인 가치를 공격하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공격하고 희화화하는 저열한 수준의 영화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종교와 그를 믿는 믿음 자체에 대해 부담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무거운 영화입니다. 어쩌면'아무리 신은 완벽하고 사랑이 넘치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하지만 너희는 결국 인간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점점 대답할 것이 사라져가는 이 세상 풍조를 대변하는 영화인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제목 <더 킹>을 보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의 '공중의 권세 잡은 자'(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2)라는 단어입니다. 진정한 주인이 오기전까지 세상의 권세를 잡고 왕이 되어 통치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고민하고 싶지 않고, 고민하기 부담스럽지만 언젠가는 대답해야합니다. 그 왕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의 삶 안에 잔인한 질문을 던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참고
- 소설,영화 <파리 대왕>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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