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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영상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2002

by RaccoonB 2012. 4. 30.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2002)

The Man Who Wasn't There 
8.5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빌리 밥 손튼, 프란시스 맥도맨드, 제임스 갠돌피니, 마이클 바달루코, 캐서린 보로위츠
정보
드라마, 범죄 | 미국, 영국 | 116 분 | 2002-05-03

 

 

 

서언

 

'그 영화 어때?' 하는 물음에 대한 여러 대답 중, '그거 누구 감독 영화야.'는 부정적인 의미든, 긍정적인 의미든 꽤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한 감독이 다수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보여줬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그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인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코엔 형제의 영화다. 과연 이 영화에 대해 이보다 더 명료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의 스타일은 확고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들의 중첩과 연결, 아이러닉한 전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무한 결말은 그들의 영화에 빠지지 않는 키워드다. 관객들에게 황당함이나 허무를 주는 한편으로, 다소의 유쾌함과 실소를 동반하는 점, 나아가 그러한 아이러니를 통해 삶에 대한 통찰을 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확고함은 매력적이다.

 

 

 

평범함

 

영화의 주인공 에드는 이발사다. 하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가 이발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발소에서 일을 하고 있을 뿐.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직업은 오랜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꿈의 성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어쩌다보니까결혼을 했고, 어쩌다보니까 처남의 이발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에드가 스스로를 뭐라고 여기든 그는 이발소에서 일을 하고 있고, 매일 사람들의 머리를 자른다. 그래서 모두는 그를 이발사라고 부른다. 평범한 이발사.

에드가 놓여있는 상황들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다. 회사 재무 담당으로 일하는 아내는 직장 상사와 불륜에 빠져있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발소 주인인 처남은 조금도 쉬지 않고 시덥잖은 수다를 떨어댄다. 주말에는 친지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역할에 충실히 임한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말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다양하고 많은 사건과 상황들 속에서도 이러한 평범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평범함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핵심이 되는 것은 에드라는 인물이 가진 성격이다.

에드는 자연스럽게 모든 상황과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수긍한다. 한마디로 덤덤하다. 심지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덤덤하다. 물론 그에게도 인간적인 감정과 동요는 있다. 아내가 죽고 난 후, 점쟁이를 찾아가 아내의 영혼을 만나고자 하는 장면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가 어떠한 초인이나 성인이 아님에도 그가 덤덤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를 둘러싼 특별한 상황에서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욕구와 상황과 역할에 충실하고 자연스럽게 대응한다.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말이다.

따라서 평범함 외에 그가 가진 어떤 특성을 통해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부인의 불륜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내비치지 않는 모습은 무척이나 비윤리적이지만,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는 부분에서는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지인의 딸에게 지나칠 정도의 호의와 관심을 쏟고, 그녀가 친한 남자아이에게 다소간의 질투를 느끼는 듯 하지만, 그녀의 유혹에는 당황해하며 거부한다. 그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에 대해서 다 이야기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가 평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럼 과연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에드에게 자신을 대입하며 그를 단정 짓고 평가하지만, 정작 아무도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영화 후반부 재판장면에서 유능한 변호사 리든슈나이더는 에드를 변호하기 위해 그가 너무나 평범한, 단지 이발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떠한 특색도 가지지 못한, 가질 기회조차 갖지 못한 현대인(Modern Man)’이라고 그를 칭하면서 그의 범죄를 사회의 산물로 만든다. 그에게서 어떠한 고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음을 통해 그를 사회와 세계의 일부로 희석한다. 배심원들은 자연스럽게 에드에게 자기 자신을 대입하며 에드에 대해서 단정하고 동일시한다. 에드에게 이보다 더 마땅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마땅한 평가에 대해 그의 처남은 분노하며 주먹을 날린다. 그리고 외친다. ‘넌 대체 어떤 사람인거냐(What kind of man are you)!’ 역설적이게도 이 또한 그에게 마땅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어떻게도 파악할 수 없는 에드, 모두가 그를 이발사라고 하지만, 그 자신은 이발사가 아니다. 누구나 그를 알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에드의 존재는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사용하는 평범함(Odinary)이라는 단어가 가진 너무나 불명료한 개념에 대해 그 자신을 통해 기술하는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평범한 사람(Ordinary Man)은 대체 누구인가?

 

 

일상속의 특별함, 하지만 일상과는 다른.

 

우리가 흔히 영화같다.’, ‘드라마 같다.’고 이야기하는 상황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일어나기 힘든 것들이다. 일상이 평범함으로 규정되는데 반해 영화가 드라마와 같은 가상은 특별한 것으로 취급된다.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상황들을 동경하고 기대한다. 삶이 드라마틱하게 전환되는 시점에 대한 많은 환상들은 문학이나 영상을 통해 반영되고 투사되어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누구나 한번쯤 모든 것을 내버릴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기대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한방에 역전시킬 기회의 순간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특별함이 없는 삶에 대해서 무료함을 느끼고 지루해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의 일상이다. 하지만 삶에 있어 과연 특별함은 그렇게 기대할만하고 흥분되는 것일까?

평범한 주인공 에드의 일상에 끼어드는 이들에게는 항상 특별함이 뒤따른다. 에드는 영화 상에서 자주 지인의 딸 레이첼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가고는 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연주에서 알 수 없는 특별함을 느낀다. 그녀의 놀라운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바치고자 하는 열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재능을 마주한 음악선생은 딱 잘라 말한다. 그녀에겐 특별한 느낌이 없다고. 에드가 느꼈던 특별함이 다른 이의 일상과 만나는 순간 그 특별함은 힘을 잃는다. 하루에도 찾아오는 수십명의 아이들의 연주를 듣는 음악 선생의 일상은 사소한 특별함에 대응할 정도로 드라마틱하지 않다. 다소 무료하고 덤덤하게, 연주를 듣고, 판단하고, 고지한다. 음악이라는 분야의 특성을 제외하면 공장의 제조공정과 그리 다를 바 없다.

환상을 기대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불행하게도, 특별함은 항상 주관적인 사태다. 빅 데이브의 부인 앤 너드링어는 남편의 죽음 이후 에드를 찾아와서 부부가 겪은 놀라운 사건을 이야기해준다. 그들이 겪었던 외계인과의 조우가 그것이다. 그녀가 겪은 특별한 사건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이 외계인과 정부가 얽힌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사건으로 여기게 했다. 특별함의 마력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추측과 상상이 뒤얽힌 음모론을 굳건히 믿고 거기에 대해 심지어 에드에게 경고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론은 에드에게는 그저 자신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대한 무의미한 추측에 불과하다. 앤의 특별함은 에드의 일상과 만나 힘을 잃는다. 마치 레이첼이 그저 피아노를 잘 치는 평범한 아이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앤은 남편을 잃고 황당무계한 상상에 빠진 미망인이 될 뿐이다. 극 중에서 에드가 가지는 극도의 평범함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모두가 자신의 특별함을 내세우며 에드와 자신의 관계를 그 특별함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에드는 그 어떤 상황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이 의도한 특별함을 무력화시킨다. 다시말해 모든 상황에 대해 관조하는 그의 자세가 그의 평범함의 근거인 것이다.

따라서 에드에게 가상을 강요하는 어떤 시도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죽은 아내를 부검한 검시관은 아내의 임신 사실에 대해 심각하고 조심스럽게 에드에게 이야기하지만 에드는 덤덤하게 아내는 지난 몇년간 나와 잠자리를 한 일이 없소.’라고 말할 뿐이다. 아내가 죽고 처남은 술독에 빠지고 이발소는 파산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그저 매일 이발소에 나가서 일을 한다. 처남만큼 수다스러운 부하 직원을 데리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구치소에 있는 에드에게 어느날 밤, 구치소 문이 모두 열리며 UFO와 조우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는 덤덤하게 UFO를 바라보다 이윽고 문을 닫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간다. 그의 대사처럼 미로 속에서 막힌 길을 보고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돌아서 다른 길을 찾는 것, 모든 상황에 대해 그것이 가진 특별함을 찾고자 노력하고 실망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계속 걸어나가는 것. 때문에 모든 특별함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에드의 관조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에드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음을 앞두고 그의 머리를 스쳐간 기억은 어떤 특별한 기억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일광욕을 하며 담배를 피우는 에드를 찾아온 방문판매원, 그를 쫓아내는 아내, 그리고 둘의 시간. 그저 어느때나 있을법한 그런 사건이었다.

 

 

 

부조리

 

에드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물론 아내를 잃었으며 생활은 위기에 처했고 정서적인 고독과 고통을 겪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행위 자체에 대한 대가는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도리어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의 대가로 처벌을 받는다. 아내를 구하기 위해 거의 전 재산을 들여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아내는 재판도 받기 전에 자살한다. 돈이 떨어져 선임한 변호사가 물러나자 무죄로 향하던 재판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다양한 개인과 상황과 우연이 겹쳐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결과가 벌어지는 부조리의 연속은 두 가지 상반된 명제를 시사한다. 결국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낸 결과는 그 의미들의 총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우리에게 수없이 쏟아지는 만약에 ~~다면?’ 이 알려주듯 그 결과를 통해 그 모든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드는 그저 사기를 당했을 뿐인데 그게 그를 사형으로 인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따라서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분히 개연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뒤섞는 것은 다름아닌 부조리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신비, 혹은 모순들이 결국 근거없는 개연을 만들어내고 결과를 이끌어낸다. 여기에 인간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 그저 매 순간 순간 선택하고 행동할 뿐, 그 결과에 대해 불평할 수도 항의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받아들이기에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과 무척 닮아있다. 뚜렷한 원인 없는 충동, 이유없는 행동, 만들어진 개연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끝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아무런 후회도 갈등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삶이 진정 그러한 부조리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라면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이를 불평하고 분노하는 것은 마땅한 대응이 아니다. 부조리에 대응해 항의하는 순간 부조리는 그런 항의를 위한 것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부조리를 부조리인 그대로 두고 이를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최선이다. 에드가 아무런 저항 없이 모든 판결에, 자신의 노력이 좌절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부조리를 향한 최고의 저항이다. 그 때에 우리는 조그마한 기대라도 품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부조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에 어쩌면 진정한 의미, 개연,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설명이 어디엔가 존재하지 않을까?

형장으로 끌려가는 에드의 대사처럼, 결국 의문 투성이인 우리의 삶에 대해 섣불리 답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엇이라도 하고, 그 한 것들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수밖에는 없다.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끝나는 순간은, 비극이 아닌, 답을 향한, 진리와 진실을 향한 또 하나의 걸음일 테니까 말이다.

 

 

 

 

영화는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일반적인 엔딩의 기회는 여러번 찾아온다. 평범한 영화처럼 끝맺을 수 있는 통속적인 장면들 말이다. 이를테면 에드가 빅 데이브를 살해하고 돌아왔을 때, 아내 도리스가 자살했을 때, 레이첼과 돌아오다 사고가 나는 부분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화면은 암전되었다가 다시 돌아온다. 마치 그렇게 그럴듯하게 끝내버리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드라마틱한 순간은 끝나도 삶은 계속 된다. 힘든 일, 즐거운 일, 우리에게는 많은 놀랍고 비현실적인, 물론 주관적인 그런 순간들이 다가오지만 그런 시간들과 상관없이 삶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어떠한 의문도 없이 명확하게 독자의 시선속에서 진행된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더 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그래서 에드의 삶은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 그를 둘러싼 상황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영화는 결코 어떠한 하나의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특별함이 주관적이었던 것처럼, 의미 또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설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해석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삶을 살아가고, 지켜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하나의 기승전결이 끝나도 영화는 계속되는 것처럼, 영화는 끝났지만 우리의 의문이 계속되는 것처럼, 의문이 사라져도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삶이 끝나도 모든 것은 계속되는 것처럼. 의미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다시 또다른 생성과 사멸이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아마도 삶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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