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체에서 진짜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씬은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직원이 스탠리 큐브릭 특별전 표를 주는 바람에 다시 가서 환불하고 다시 표를 끊고 하느라고 처음 10분가량을 놓쳤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앞부분에서는 주인공 시로츠구가 해군 파일럿에 지원했다 실패하고 왕립우주군으로 들어오는 과정이 있다고 한다. 영화는 왕립우주군 중령인 시로츠구 라닷트에서 시작된다.
왕립우주군
이 영화의 핵심 소재가 되는 왕립우주군은 전략적으로 유인 우주전함을 사용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오네아미스 국에서 창설한 군대다. 하지만 이 왕립우주군의 존재 자체가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 이 시대에는 아직 사람을 우주로 쏘아올릴 수 있는 기술이 없다. 우주에 갈 수 없는 우주군, 이런 판국에 제대로 된 우주군 활동이 이루어질 수가 있을리가 없다. 대부분의 우주군들은 (그래봐야 다 합쳐 10명도 안된다) 그냥 저냥 혹시 있을지도 모를 우주군 활동에 대비하여 훈련을 하거나, 일이 끝나고 유흥가에 들러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이 다다. 이것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던져지는 큰 질문이다. 우주로 갈 수 없는 우주군의 존재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게다가 이들이 우주로 갈 수 있다는 확신과 열정으로 뭉친 이들이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냥 더 나은 직업을 찾지 못해 남아있는 이들일 뿐, 왕립우주군으로서의 프라이드나 열정은 전무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우주에 대한 어떠한 소망이나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주인공 시로츠구가 우주비행사로 자원하는 장면에서 모든 동료들이 비난과 만류를 쏟아붇는 장면에서 이러한 이들의 무기력함은 극도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의 주인공 시로츠구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정말 인류가 우주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인물은 왕립우주군을 창설하고 20년 동안 맡아오고 있는 장군과 로켓을 만드는 기술자들뿐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이 왕립우주군의 창설의 결정적인 계기가 다름아닌 <우주에 갈 수 있다> 라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어설픈 책 한 권의 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진지하게 믿지 않고 누구도 실현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누가봐도 허황된 꿈을 현실로 불러오는 바로 그 가교가 이 왕립우주군이 처해있는 현실이다.
꿈에서 현실까지. 멀기보단 복잡한.
그렇게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시로츠구 중령은 길을 가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신의 경고를 전하는 한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를 찾아가게 된다. 소녀의 이름은 리이크니 논델라이코. 신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전쟁과 폭력을 증오하는 소녀다. 별 생각 없이 어떻게 수작이라도 걸어볼까하고 찾아간 시로츠구의 이야기를 리이크니는 진지하게 들어주며 왕립우주군이라는 허황된 정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준다. 시로츠구는 비로소 아무도, 심지어 자신들 스스로도 부인하고 있던 우주라는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진지한 자세를 바탕으로 시로츠구는 6번째 우주여행 대상자로 지원하게 된다.
최근에 친한 형이 신앙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짓,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바보가 되는 일, 하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역사'
본인들도 믿지 못하는 일을 믿어주었을때, 시로츠구는 우주가 현실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는 작은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꿈과 현실의 간극이 좁혀지는 과정은 영화 전반의 큰 흐름으로 작용한다. 30년이 넘게 우주여행에 대한 믿음을 철석같이 유지해왔던 장군은, 실현가능성에 대한 아무런 신뢰도 없이 단지 적대국과의 관계에서 써먹을 전략적 도구로 우주계획을 생각하는 고위 관료들에 부딪힌다. 우주계획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도리어 많은 반왕정파 사람들이 우주계획의 허황됨을 지적하며 이를 방해하려 여러 공작활동을 벌인다. 심지어는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까지 왕립우주군은 '할 수 있다'라는 작고 소박한 믿음을 지켜나가는데 수많은 많은 방해에 부딪힌다.
로켓발사직전 모든 것을 포기하자는 장군의 이야기에 시로츠구는 격렬히 거부하며 외친다.
'아무 의미없는 일이라구요? 그건 아니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역사책에 실릴 정도로 훌륭한 일이잖아요!
...갈테면 다들 가버려! 난 끝까지 남아서 계속할테니!'
꿈을 현실로 이어간다는 것은 어떤 대단한 믿음과 능력이 필요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작은 믿음이라도 지켜나가며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시로츠구는 영웅물에 나오는 주인공의 요소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더없이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단지 그는 '우주'라는 꿈을 향해 계속 걸어갔을 뿐이다. 의미없어 보이고 허황되어 보이는 것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것의 가치.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그 자신들마저도 확신할 수 없고, 부정하는 그 가치, 왕립우주군은 그 모든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에 대한 통찰
시로츠구와 로맨스(?)를 이루어가는 히로인 리이크니는 신을 섬기고 매일 길거리에서 그 신의 말씀을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전하고 있는 내용을 보자면, 태초에 인간이 신에게서 불을 훔쳤고 신은 이런 인간의 죄악을 저주하여 인간에게 죽음을 선사하였으며, 역사의 시간내내 불로 인해 폭력과 공포의 시대를 보내게 될 것이고 결국 그 불로 인해 멸망하리라. 는 묵시를 전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기본적인 모티브를 따온 듯한 이 내용은 인류의 역사가 기본적으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리이크니의 부모님은 항상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싸웠다. 그 때문에 리이크니의 무뚝뚝한 동생 마나는 싸움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갖게 되었고, 리이크니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전쟁을 경멸하지만, 막상 그러한 폭력이 자신에게 가해졌을때는 그러한 폭력마저도 이해하고 감싸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완벽하게 용인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한다. 이는오른뺨을 맞고 왼뺨도 내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는 전형적인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리이크니/마나 자매를 말세를 바라보는 종교인의 표상으로 보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고도화되고 더더욱 야만스러워진 폭력이 바꾸어놓은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폭력에 적극적으로 항변하고 거부하지만 막상 닥친 폭력에는 '그래도 어떡해. 계속 살아가야지.'하는 비교적 낙관적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실상 험악한 제도의 공격과 불평등의 사회속에 놓여진 우리 개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리이크니는 그 모든 죄악에 대해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말하고 있다. 본래 악한 인간의 사회에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별님의 세계다. 그의 집은 고리대금업자에 의해 강제철거당한다.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다고 믿은 남자는 옷을 갈아입는 새에 그를 겁탈하려고 덤벼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 수 있는가.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인데.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질 뿐이다. 이런 리이크니를 바라보며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던 순진하고 단순한 청년 시로츠구에게는 고민이 생긴다. 과연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고 나의 존재는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인가.
어찌보면 인류의 역사는 인류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과 성찰없이 '우리는 당연히 선한 존재다.'는 생각 속에서 계속해서 흘러왔다. 영화 중반부에 시로츠구가 던지는 '마티. 현실이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의가 아니라 악한 편에 서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는 질문에 답하는 마티의 대답을 들으면 이러한 사실은 극명히 드러난다.
'음. 그래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 사람들로 인해 살아간다고 생각해. 필요없는 건 사라지잖아.'
얼핏 들으면 동문서답 같다 싶지만 이것이 이른바 '인류의 진보'를 믿어온 이들의 생각이다. 인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강한 긍정. 사실 많은 사람들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해 너무나도 강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그들 자신은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이끌어내어 지금도 역사의 진보를 이끌고 있는 자랑스러운 인류의 일원이니까. 하지만 인류의 존재가치라는 것이 그렇게 선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걸까.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성경에서는 카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인 최초의 살인 이후로, 전쟁은 1분 1초의 여유도 없이 쉴새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전쟁이 가져온 인권의 유린과 수많은 개인의 고통, 사회의 붕괴 앞에서도 우리는 과연 '인류의 존재가치는 선(善)이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시로츠구는 그 고민에 확실한 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그는 이제 우주시대를 최초로 연 사람이 되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우주에 오게 될 것이고, 리이크니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별님의 세상'도 머지않아 인류의 폭력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공간으로 변모할 것이다(실제로 이들은 왕립우주'군'소속이며 그들의 우주계획도 공식적으로는 '우주전함'추진계획이다). 그리고 시로츠구는 순수했던 우주공간을 이제 그 폭력의 무대로 전환시킨 첫 사람인 것이다. 그 첫 사람으로서 그는 (아마도 이 우주도 곧 인간의 악함으로 물들겠지만) 새 세상을 밝혀올 빛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정확히는 왕립우주군 내의 세계의 역사)가 수백장의 컷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누구나 나의 존재 자체는 선하다고 여기는 너무나 당연한 믿음에 대한 성찰, 그리고 반성. 많은 이들에게 시로츠쿠 라닷트라는 한 인물이 우주라는 새로운 공간을 개척한 이야기는 인류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신호탄으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진정 '선'인가에 대해 우리는 조금은 반성을 해야한다고 그는 누군가 듣고 있을, 그 방송으로 외친 것이다.
도전하는 꿈, 그리고 방향
진보와 보수, 비단 정치 뿐 아니라 사회의 어떤 면에서도 존재하는 이 대립에서 양 진영이 강하게 신뢰하고 있는 하나의 믿음은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어떠한 방향이 있으며 그 방향은 언제나 선하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 아래, 세상은 수많은 전쟁을 저질렀고, 인간은 하늘을 정복했으며, 우주를 정복했고, 지금도 수많은 기술과 정보와 사상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 30년 전 출간된 한 책에 근거한 꿈이 긴 시간과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거쳐 현실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린 이 만화에서 그들은 분명 성공했고,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옳은 방향인가. 이들의 성공은 이 세상 전체로 보았을 때, 선을 향하고 있는가, 악을 향하고 있는가.
모든 절대적 진리의 부정과 상대적 진리라는 모순(진리가 상대적이라면,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그 진리 역시 상대적이므로, 상대적 진리란 성립할 수 없다)이 믿어지는 이 시대에 자신의 방향에 절대적 신뢰를 마다하지 않으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들은, 어쩌면 멈춰서서 그들의 지평선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옳고 그름을 우리가 알고 판단하는 것에 앞서,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다시금 우리의 머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부록 : http://extmovie.com/3647 알고 보자 왕립우주군.
'잡다 > 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퍼레이드> 2011.8~12.3, 27화, 완결 (0) | 2012.05.30 |
---|---|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2008 (0) | 2012.05.28 |
<샤이닝>, 1980 (0) | 2012.05.18 |
<그린마일>The Green Mile, 1999 (0) | 2012.05.11 |
다이라 아즈코 단상 (0) | 2012.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