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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영상

에반게리온, 그리고 마도카 마기카.

by RaccoonB 2015. 6. 9.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중요 내용 및 결말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반게리온을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장면, 초호기에 탄 신지는 다음의 대사를 강박적으로 내뱉는다.

"도망치면 안돼. 도망치면 안돼."

애니메이션의 주 시청자가 청소년임을 고려해서였겠지만 오랜 시간 선라이즈를 위시한 로봇만화들은 세계를 지키는 로봇의 파일럿으로 청소년들을 등장시켜 왔다. 성장물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소년들은 세계와 인류의 운명을 등에 업고 위험천만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점에서 신지의 대사가 주는 충격은 크다. 어린 시절에 헤어지고 처음 만난 아버지는 말한다. "에바에 타라." 하지만 왜? 무엇을 위해서? 유약한 소년인 신지는 잠시 거부하나 주위의 분위기를 본다. 사도의 습격에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은 이들의 불안한 시선이 내리 꽂힌다. 그렇게 내몰린 신지는 에바에 타고 처음보는 적과 마주한다. 그리고 외친다.

"도망치면 안돼."

하지만 왜 도망치면 안되는 것인가?

에반게리온(TVA) 작중에서 신지는 계속해서 자신이 에바에 타야할 이유를 찾는다. 때로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인정받기 위해, 또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러나 만화는 집요하게 그가 찾아낸 이유들을 망가트리고 부서트린다. 만화는 결국 그가 외부로부터 찾은 어떤 이유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세계와 인류를 위한 제레의 거대한 계획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신지는 그 안의 장기말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진심으로 타야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TV판이 그래도 타인과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끝나는 한편,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결국 이유를 찾지 못하고 휩쓸려 에바를 탄 신지가 제레의 인류보완계획을 다소 거부하며 아스카와 남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혼자는 싫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 계속되는 인상을 준다. 인류는 결국 이 고민덩어리 중학생을 아담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로봇에 탄 소년이 외부의 강압을 거부한다는 플롯은 토미노 요시유키의 건담에서 이미 살짝 선보인 바 있다. 동네에 떨어진 건담에 생각없이 올라탄 아무로는 그 타고난 재능으로 전쟁의 영웅이 되지만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도 같이 마주한다. 후속작 기동전사 건담Z에서는 이런 플롯이 보다 강화되어 주인공 소년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토미노 요시유키의 작품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성장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은 소년이 끝까지 '어른스러움'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사뭇 달라진 관점을 보여준다. 소년이 모두의 기대와 희망에 부응하기 위해, 또는 특정 집단의 숭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망치지 않고 희생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2011년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이 플롯을 소녀를 소재로 해서 변주한다. 로봇에 타는 소년만큼 오랫동안 전통으로 남아있던 변신마법소녀가 이제 고민하기 시작한다.
왜 소녀는 세계를 지켜야 하는가?

마마마가 그려내는 여성상은 그렇게 입체적이지는 않다. 이는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그렇게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가 아니고 늘상 주변에 휩쓸리는 인물이었던 점과 유사하다. 만화에서 등장하는 여자아이들은 기존 만화에서 보이던 마법소녀 캐릭터들의 성격을 그대로 답습한다. 착하고 바른 아이, 활달하지만 좋아하는 남자아이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아이, 맹한 성격이 귀여운 아이. 그러나 이들이 참여할 전장은 실제로 목숨을 잃는 전쟁터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전쟁에서 소녀들은 자신이 싸워야할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주인공 마도카가 마지막화 전까지 찾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들에게는 항상 싸우기를 강요하는 생물 큐베가 따라다닌다. 큐베는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감정이 없고 그저 목적에 충실한 존재다. 큐베의 합리성은 '살고 싶음', '돕고 싶음'등등의 소녀적인 소망들을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에반게리온에서 이런 합리성이 주로 '아버지'로 대변되는 인물들로 나타나며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구도를 만들었다면 마마마는 한발 더 나아가 여성에게 희생과 포용을 감당하도록 강요하는 분위기 전체를 큐베를 통해 대변한다. 큐베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며 죽여도 다시 나타나며 어떤 것으로든 대체될 수 있다. 소녀들은 이 안에서 자신들의 작은 희망과 꿈에 매달리며 소진되고 고사되어 간다.

에반게리온이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고민과 불안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결말을 보여줬다면 마마마는 다소 희망적인 전망을 내비치고 있다. 작품 전체의 주제인 '친구'는 어떤 면으로는 여성 간의 연대, 혹은 틀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왜 어른은 스스로가 만든 체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이를 특정 계층에게 떠넘기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나아가지는 못한 듯 싶다. 여전히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달디 단 수식어 아래 자신들의 삶을 저당잡히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사회번혁을 위해 흔히 사람들은 '교육'을 중요한 주제로 내세운다. 여기에는 현재를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픈 비겁함, 후세의 사람들을 자신들에게 필요한 대로, 원하는 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오만함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도를 이루기 위해 실험을 계속하는 가운데 이 실험의 당사자들이 무엇을 느끼는지는 위의 두 작품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다.
강요를 거부하고 저항해도 된다는 세기말의 메시지는 2011년으로 이어져 강요의 바깥이 있음을 보여주는 데 이르렀다.
이 흐름이 결국 어른들의 비겁함에 맞서 투쟁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이를 지, 아니면 여전히 무기력한 어른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아이들이라는 판타지를 생산하는 데 머무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매체가 단순히 모두를 즐겁게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자신들만의 문법과 언어를 통해 보다 노골적인 주제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독립의 트릴로지가 완결될 다음 10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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