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더 마인호프 (2009)
The Baader Meinhof Complex





- 감독
- 울리 에델
- 출연
- 마르티나 게덱,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 요한나 보칼렉, 브루노 간츠,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 정보
- 액션, 범죄 | 독일, 프랑스, 체코 | 150 분 | 2009-07-23





적군파
68혁명에 대해서
68혁명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와 국가에 대한 정의에 경종을 부른 거대한 흐름이었습니다.
68혁명은 단순한 시위를 넘어서 경찰국가화, 경제질서에 종속된 가치에 경종을 일으키려는 흐름이었습니다.
수많은 학생과 집단들이 시위와 저항에 동참했습니다. 다양한 방면에서의 저항은 독일에서 가장 악랄한 도시 게릴라인 '적군파'를 만들어 냅니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는 이 적군파의 시작과 끝에 대한 기록입니다.
적군파의 로고 울리케 마인호프 안드레아스 베른트 바더
사실 그 자체
영화는 시간 흐름에 따라 적군파의 형성, 활동, 그리고 주요 인원들의 끝을 보여줍니다. 시각은 때로는 냉정하며, 사실과 감정에 충실합니다.
바더는 혈기 넘치는 남성입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파괴하기를 즐기는 인물처럼 그려집니다. 그에게 혁명은 큰 놀이터였고, 행동은 사상보다 앞섭니다. 모든 도덕은 이념의 산물이며, 모든 권력은 억압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파괴되기에 마땅합니다. 그런 권력과 이념에 종속된 것들이나 아니면 그러한 권력과 이념 자체이든. 따라서 그는 차를 훔치고 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의 행동들은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마인호프는 급진적 성향의 정치부 기자입니다. 그녀는 보수적인 주류 세력과 정치권력에 펜과 말로 대항하지만 항상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답답함에 마주합니다. 그녀에게는 모든 행동을 뒷받침할 사상이 있고, 합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존중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회를 진정으로 변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실할 수 없습니다.
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은 행동가 여성인 엔슬린을 통해 하나(Komplex)로 묶입니다. 둘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명은 백화점을 폭파했고, 한 명은 그에 대한 기사를 씁니다. 전혀 다른 둘의 시너지는 대단했습니다. 마인호프는 철저하게 계산된 계획을 세우고 바더는 이를 실행합니다. 그리고 마인호프는 여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그들의 폭력은 사상과 국가에 대한 합리적인 저항으로 변모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둘의 대립이나 고민, 연대의 형성을 자세히 그리지 않습니다. 영화가 나타내는 것은 실제로 적군파가 저질렀던 사건들의 진행입니다. 쓸데없이 둘의 내면을 자세하게 그린다거나 둘의 논쟁을 보다 자세하게 서술하기 보다 사실 그대로를 드러내는 이러한 서술방식은 한편으로 두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 더불어 참여한 적군파의 다른 인원들과의 작용에 대해 여러모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바더 - 본능적인 저항
바더가 애초에 어떻게 저항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바더는 그저 '망나니' 그 자체입니다. 그에게는 단지 '폭력'을 위한 수단과 방법만이 필요하고, 그리고 '폭력'을 저지른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이 요구하는 명분이나 숭고한 의미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모든 행위는 '허세'입니다.
바더의 행위에 대해 감동을 받고 참여하는 이들은 그의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과 주저하지 않는 행동력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그는 꽤나 저열한 인물입니다. 반군 훈련 캠프에 참여해서는 시종일관 불성실한 태도를 유지하고, 실패 앞에서 타인들을 비난하는 단선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가 저지르는 모든 일이 실질적인 피해와 타격으로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항상 우리는 말로만 이상을 꿈꾸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반감을 가집니다. 공약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자친구, 담배를 끊지 않는 남편들은 항상 그런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바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보는 인물입니다.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합리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궤변으로 무시해버립니다. 그야말로 그는 모든 제도와 권위도 통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유리한 제도는 모두 사용하지만 어떠한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이런 그의 광오한 태도는 무수한 비난의 여지를 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가장 매력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항상 올바른 사람이 될 것을 강요받습니다. 국가, 사회, 학교, 그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모두는 우리에게 적당한 도덕과, 적당한 규율을 통해 통제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를 따르게 하고 우리도 그런데에 별 생각없이 따르고는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런 규율을 좋아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으면 고민이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따르고 있는 규율 대부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자의식이 강하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청소년들의 탈선은 그러한 바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지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답답하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사회가 원하는대로 살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나쁜 기분이 그들을 향한 '동경'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는데 왜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은 그들을 우리와 동일하게 만들기위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바더는 바로 이 '폭력'을 비웃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데 뭐가 문제지? 하는 그의 태도에게서 우리는 우리 안의 본능적인 저항감을 느낍니다. 바더의 테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그의 열정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이며 작위적인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합리적인 이야기를 떠들어대도 우리는 그들이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듭니다. 그리고 바더가 이야기합니다.
'저항해. 그들의 말을 듣지마.'
이런 그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마인호프 -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
바더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인간이었다면 마인호프가 바라는 것은 '가치'입니다. 그는 세상에 정의와 평등이 구현되기를 바랍니다. 이란의 샤(황제)가 방문할 때, 이란에서 일어나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고, 시위대를 공격하는 경찰을 비난합니다. 그는 사회에 무관심하지 않고 정의로운 것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의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
이런 마인호프가 바더에게 동참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그에게 바더의 저항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더를 통해서 마인호프는 자신이 생각했던 일들을 실행해나갑니다. 그가 테러때마다 발표하는 성명서는 일부에게는 허울좋은 변명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마인호프 자신에게는 이상의 실현이었으며 점진적인 변화의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은, 불의(폭력)을 통해 이룩한 정의가 과연 정당한가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바더와 마인호프가 끊임없이 부딛히는 지점도 그러한 부분입니다. 마인호프는 자신들의 조직이 보다 정의롭고 정당하기를 바라지만, 바더는 이를 일축합니다. 폭력은 그저 폭력이지 어째서 '무엇을 위한' 폭력이 되어야 하는가. 마인호프는 끊임없이 이러한 모순에 시달립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마인호프가 슈프링어 신문사 폭파사건을 돌아보는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기자였던 그가 끝까지 언론을 통해 개혁과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신문사를 폭파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다는 점은 그녀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삶의 아이러니였을지 모릅니다.
저항
우리는 우리를 얶매는 많은 것들이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부정을 저지르는 정치인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빈부의 격차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학력에 따른 불평등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마다가 자신들의 해답을 들고 나옵니다. 누구는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며, 누구는 과거를 청산하겠다고 하며, 누구는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선적인 해결책은 결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권력은 항상 행사하는 이와 억압받는 이 사이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관계를 계속해서 자신을 은폐하며 비밀스럽게 그 관계를 개인속으로 내재화한다는 것은 푸코의 연구를 통해 이미 드러난 바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다양하고 보다 확실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설사 그것이 폭력을 위한 폭력일지라도 말이지요.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를 그러한 대안으로 보기에는 힘들겠지만, 저항의 의지를 불태우고 그러한 시도를 고민했던 이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지금의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남깁니다.
p.s : 바더 역의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는 또다른 독일영화 <소울 키친>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참고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 리뷰
http://inmoon.hosting.paran.com/xe/index.php?document_srl=5529
위키 백과 - <바더 마인호프> 항목
http://ko.wikipedia.org/wiki/%EB%B0%94%EB%8D%94_%EB%A7%88%EC%9D%B8%ED%98%B8%ED%9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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