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영화 중에 '시민 케인'이 있다. 감독이자 배우로 유명한 오손 웰즈의 1941년 데뷔작으로 수많은 최고의 영화 앙케이트와 IMDb와 같은 인터넷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 높은 순위를 항상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지만 정작 시민 케인의 어떤 부분이 대단하고 어떤 부분이 좋은 지 아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단 한번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작품이라 그렇다. 일년에도 수백, 수천편의 영화가 전세계에서 쏟아져 나오고 우리나라에 개봉하는 영화만 백편을 넘는 이시대에 굳이 보기도 힘들고 볼거리도 없는 흑백영화를 굳이 찾아서 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지금 봐도. 그리고 누가 봐도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영화들이 많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열 두명의 성난 사람들'도 바로 그런 옛날 흑백 영화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영화라고 감히 말해본다.
이해관계
영화는 홧김에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18세 빈민가 소년의 심리공판에서 시작된다. 미국이 형사심판에 사용하고 있는 배심제에 따라 12명의 사회인사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검사와 변호사 및 증인의 말을 듣고 소년의 유/무죄 여부를 판결하기 위해 하는 토론이 이 영화의 주 소재이다.
배심제는 사건에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보다 공정하게,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이들의 토론을 통해 유/무죄 판결에 대한 납득 가능한 보편적이고 명확한 이유를 선정하기 위한 제도다. 12명의 배심원은 각자의 생각과 의견, 증인의 증언과 증거에 따라 공정하고 명백한 판결을 내기 위해 고민한다.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모두는 별다른 이야기와 고민도 없이 소년의 판결에 대한 투표를 실시한다. 결과는 유죄 11. 무죄 1. 유죄를 선택한 이들은 괜히 잘난 척하며 무죄를 선택했다고 여겨지는 한 명을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보낸다. 오늘의 사건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한 후 집에 들어와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며 소년의 알리바이를 딱히 증명할 것도 없으며 소년의 범행을 목격한 이도 있으며 소년의 범죄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언도 존재한다. 게다가 소년은 그전까지 폭력과 절도 등으로 악명이 자자한 아이였다. 무엇을 더 고민한단 말인가. 헌데 왜 무죄를 선택했는 지를 묻자 '무죄인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까지 유죄라고 하면 이 친구의 목숨은 끝이잖아요. 그럼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상황은 명백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더더욱 명백하다. 그리고 모두가 이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다. 별 생각 없이 잘 처리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항상 쓸데없는 이의를 달기 좋아하는 이가 이야기한다. '글쎄. 근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아무래도 좀 아닌 거 같은데..'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 주로 이렇게 이의를 다는 쪽인가? 아니면 이의를 다는 이를 묵살하는 쪽인가? 두 쪽 모두 경험한 적이 있겠지만 보통은 마음의 드는 조금의 의문은 있지만 '뭐,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하고 대충 넘어가는 쪽이 대부분일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 나 혼자서 딱히 확실한 이유도 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어물쩡 넘어가는 회색분자이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어물쩡 넘어간 문제가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가? 그래도 과연 그렇게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 그렇게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죄를 선택한 모두는 그날 저녁에 벌어질 야구경기나 자신의 중요한 사업상의 약속을 신경쓰며 어떻게하면 대충 빨리 끝내고 집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판사와 배심원장이 '여러분의 선택에 한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막중합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다. 판사와 배심원장도 그저 의례상 한 말에 불과했으니까.
고민과 대화, 회의와 토론이 가지는 가치?
'토론'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안되서 일이다. 내각 구성을 비롯한 여타 움직임을 통해 검찰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느낀 전국 지검 평검사 70명이 단체 성명을 발표하는 등의 거부반응을 보이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전국 지검 평검사와의 대화'를 열어 직접 검사 대표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대통령이 사회적 반향에 직접 나서서 대화를 청하는 것은 파격적이었지만 토론하는 사회를 만들겠다 공언하던 그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하는 유행어를 퍼트리며 썩 좋은 토론회가 되지는 못했지만, 위에서 누르고, 여차하면 잡아가는 그동안의 대통령의 '집권'과는 그 방향을 달리하는 시도였다.
또 한 가지는 예전에 MBC <명랑히어로>라는 버라이어티 쇼의 한 코너인 '명랑토론회'이다. 각자 읽어온 책이나 고민하는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코너인데 실상은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게스트 2명을 두고 MC 네 명이 계속해서 농담따먹기를 하거나 자신들의 교양없음을 이용하여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토론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의 의견이나 서로의 의견을 놓고 이야기하는 모습보다는 시종일관 말장난과 희화화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코너다.
우리가 시도하는 대부분의 회의, 대화, 고민, 토론은 '전국 지검 평검사와의 대화'와 같은 취지를 가지고 시작해서 결국 '명랑토론회'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나 주제의 심각성과 관계없이 그저 참가자가 가지고 있는 의욕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기 일쑤다. 마찬가지로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그들이 성낼만한 이유나 근거 없이 그저 막연한 분노와 정의감으로 소년에게 분노하며 그를 사형시키자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미 어느정도 이 영화의 결말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대화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들이 성내야할 이유를 찾기 시작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사람들은 막연한 생각과 의지를 내보이기 보다 진실을 찾고 옳은 것, 바른 것을 추구하는데 열의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꺼림찍한 느낌에서 비롯되었지만 이것은 모든 이의 진지하지 않은 모습을 깨우치고 그들에게 맡겨진 것들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참된 것을 향한 의지요. 그 의지를 말할 수 있는 용기다. 이 의지는 결국 무관심과 무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실을 밝혀 드러내어 변화를 이끌어낸다. 비록 그 과정은 매우 귀찮고, 답답하고, 시간을 오래 필요로 했으며, 수 많은 정체와 어려움을 겪어야했지만 말이다.
진정한 협동, 협의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신이 될 수 없기에 모든 정보와 상황과 일어날 모든 경우의 수를 알고 완벽한 계획과 판단을 행할 수 없는 존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인간의 제한적인 인식능력 때문에 판단하는 모든 것에 있어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그런 판단 자체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마음에 들면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많은 가치와 생각들이 그저 그런 판단을 내릴만 하다고 공인된 사람이나,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로 일임된다. 이것이 옳은 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 이것이 그저 모두의 마음에 드는지가 더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시각과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어떠한 기준도 찾지 못한 채 오늘도 마음에 들고 관심이 가는 것을 진리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한 소년의 생명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저 오늘 있을 야구경기를 더 중요하게 여겨 아무런 심각한 고민과 생각도 없이 유죄를 외치는 열 두명의 성난 사람들과 같이 말이다.
우리는 좀 더 대화해야하고, 좀 더 서로를 돌아보아야한다. 우리가 어떤 것도 온전히,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이 시대에 소통을 위해 필요한 고통과 시행착오를 귀찮아하며 그저 내키는 대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그저 분별없이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내릴 결정이 가진 큰 책임을 방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크고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사상과 생각의 바다를 제공했지만, 결국 우리의 판단과 생각은 싸이월드 메인화면에 뜬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기사의 내용에 좌우됨을 보면 진정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에 있어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느끼는 가가 아니라 우리 한 개인의 인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인식의 완성을 향해서 '소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열한명의 성나디 성난 사람들 앞에서 한 명의 침착한 사람이 했던 것은 협박도, 억지 설득도, 무작정 우기는 것도 아닌, 단지 그들이 스스로를 열어 소통할 수 있도록 참고 기다렸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그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때로는 부끄럽고 힘들지 모르는 그 용기가 한 사람의 귀중한 생명을,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지켜낼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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